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삶, 죽음과 업적

2021. 10. 19. 16:25카테고리 없음

 

나폴레옹의 삶

 

1769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지중해에 위치한 코르시카이라는 섬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귀족이었던 아버지와 현명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나폴레옹은 공부에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0살 때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 유년 학교를 입학해 15살에는 파리에 있는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후, 발랑스의 라페르 포병 연대에 포병 소위로 일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습니다. 1799년까지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으로 일어나 봉건적 특권의 폐기 선언과 인권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훗날에 근대 시민사회 성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당시에 나폴레옹은 고향으로 돌아와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파오리와 갈등이 생겨 1793년 온 가족이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지냈던 가을에 툴룽 항 전투에서 반정부군이었던 왕당파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포병 소장으로 승진하며 잘 지내는 듯해 보였으나 급진적인 공화주의자 로베스피에르가 정권을 빼앗기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와 친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도 체포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혐의가 풀려 그는 1795년 파리에서 반란군을 집안하고 다시 프랑스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그는 조제핀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죽음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 52세의 나이로 대서양의 한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된 채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국민 투표로 황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에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등의 연합군의 세력에 패해 황급히 황제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에는 연합군의 공격이 무려 파리를 함락시킬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가족이 죽고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섬과 이탈리아 사이에 위치한 엘바 섬에 유배되었으나 불가능을 모르던 그는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다시 파리로 향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이어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국왕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8세는 국민 와 국가에 무관심했으며 결국 프랑스는 다시 혼란해졌고 이틈을 타 나폴레옹은 다시 '백일천하'를 누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마저 나폴레옹 군대는 연합군에 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쟁인 워털루 전투입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영원한 유배였습니다. 유배지에서 한 번 탈출을 성공한 나폴레옹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더욱 탈출하기 어려운 유배지로 보냈고 그곳이 바로 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 섬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업적

 

그 유명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은 나폴레옹이 한 말이었습니다. 27살의 나이에 조제핀과 결혼한 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도 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스트리아 군과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도 되어 유명한 학자들과 함께 원정길에 올라 피라미드의 비밀 등 이집트 문화를 연구하고 공부하며 로제타석을 발견했습니다. 유렵 전역을 위협할 정도로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는 강력했으며 그는 30살에 제1 통령이 됐습니다. 그는 또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으며 이번에는 무려 유럽 한가운데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알프스 산맥을 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에서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 군을 무찌렀습니다. 나폴레옹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는 패배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제도를 제정하고 종신 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5살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고 국민 투표를 진행해 황제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승승장구하지는 않았습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패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는 조제핀과 13년 만에 이혼을 하였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다음 해에 바로 오스트리아 공주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며 그들 사이에 아들을 낳아 나폴레옹 2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유럽 내 세력을 펼치던 나폴레옹의 야망은 무서운 속도로 커졌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정복을 위해 원정을 나서나 러시아의 추운 환경을 고려하지 못해 결국 철수를 했습니다. 이 틈을 타 오스트리아, 영국과 러시아 등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