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1. 17:15ㆍ카테고리 없음
슈바이처의 삶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독일 알자스 지방 카이저스 베르크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섯 살에 권스 바흐의 초등학교에 입학해 목사인 아버지에게 오르간을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소질도 보였던 슈바이처는 9세 때에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의 대리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같은 해에 묑스테르 김나지움에 입학해 이듬해에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뮐하우젠 김나지움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슈바이처는 공부도 잘해 성적도 우수했습니다. 그는 18살의 나이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진학해 아버지를 따라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21살에는 앞으로의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지 고민하다 성령 강림절 아침,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서 그 후부터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날 했던 자신의 결심에 따라 30살까지는 공부에 힘썼습니다. 24살에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도 받고 그다음 해에는 신학 박사 학위까지 받아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29살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 생활을 하다 어느 날 파리 선교회에서 나온 잡지를 우연히 읽었고 그가 잡지를 닫을 즈음에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을 구제하기로 생각했습니다.
슈바이처의 죽음
슈바이처는 1965년 9월 4일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에도 슈바이처의 옆자리는 딸 레나가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로부터 많은 도움과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도 마음만큼 함께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슈바이처의 옆에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함께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현재 슈바이처의 유해는 그의 부인 헬레네 옆에 묻혀있습니다. 헬레네는 1957년 79살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 헬레네 역시 슈바이처와 아프리카로 향해 병으로 죽어 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돕기로 뜻을 모으며 그 실천의 첫걸음으로 자신도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슈바이처의 봉사 생활에도 동참했던 헬레네는 그의 인생의 최고로 훌륭한 동반자였습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위해 낮과 밤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일했던 슈바이처는 결국 1965년 9월 1일 쓰러졌습니다. 그의 소식에 전 세계는 놀랐고 걱정했습니다. 스위스에서 급하게 비행기로 달려온 딸 레나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 아버지를 보고 오르간 앞에 앉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성가대의 음악이 퍼졌습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슈바이처의 잃음을 슬퍼하는 흑인 성가대의 슬픈 성가가 였습니다. 슈바이처의 죽음은 전 세계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인들을 매우 슬프게 했습니다.
슈바이처의 업적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직업은 다양했습니다. 그는 독일의 신학자로도 의사, 음악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의사로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30살까지 학업에 열중하기 결심한 슈바이처였지만 그는 29살에 아프리카 흑인들을 구제하기로 한 뒤부터 30살의 나이에 의학 공부를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6살의 나이에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의학 공부를 부지런히 해 38살의 나이에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으며 결국 아프리카 랑바레네에 진료소를 세웠습니다. 그는 중간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프랑스 군의 포로가 되어 프랑스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 년 여 가까이 포로 되다 전쟁이 끝난 후 석방되어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44살이었을 때 큰딸 레나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47살에는 <문학과 철학>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고향에서의 그의 삶이 안정되었을 때쯤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강연 및 오르간 연주회를 개최하여 병원 건립 자금을 모으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물과 원시림 사이>라는 책도 퍼내어 아프리카로 떠날 자금을 마련하다 결국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다시 떠났습니다. 52살의 나이에 그의 병원은 점점 커지더니 오고웨 강 상류에 새 병원을 지었고 이듬해에는 그의 노고를 세계가 인정하여 괴테 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52년 77살의 나이에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며 1955년 88살의 나이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훈장을 받습니다.